Talk/Story

체 게바라

Leader1102 2008. 6. 4. 17:57

체 게바라는 1928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의사시험에 합격하였고 의사가 되어서 편안한 삶을 살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의 일생을 바꾼 사건을 경험한 후로 안락한 삶을 버리고 혁명가의 길에 뛰어들게 됩니다.

대학생시절 체는 친구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남미를 여행하게 되었습니다(이것을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라는 영화로 각색하기도 했죠).

여행 도중에 미국과 유럽의 농장주들에게 박해받고 있는 남미의 가난한 농민들과 빈민들을 목격하게 되었는데요. 이후 체는 빈부격차, 계급문제 등에 대해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열심히 공부하였고 결국 자본주의와 타협할 수 없는 공산주의 혁명가가 됩니다.

이후 28살에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게 되었고 둘은 힘을 합쳐 쿠바에서 혁명을 일으켜 당시 자본주의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독재정부를 무너뜨리고 쿠바혁명을 달성합니다.

혁명 후에 쿠바재무국장이 되었는데요. 체는 본래 보헤미안적이고 낭만적인 성격의 소유자이였기에 한곳에 안주하는 생활에 실증을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37세일때 공산주의의 모토인 세계혁명을 실천하기 위해 아프리카의 앙골라에 건너가 그곳에서 게릴라전을 펼쳤지만 실패하고 39세때 다시 볼리비아에서 게릴라전에 참여하였다가 포로로 잡혀 총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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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립니다. '세계혁명' 이라는 대업을 이루기위해 직접 실천하였던 위대한 영웅적인 면모와, 한편으로는 잔인하고 무능력한데다가 과대망상증과 소영웅주의에 빠진 몽상가라는 두 평가가 있습니다.

제가 봤을 땐 두개 다 맞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체 게바라가 쿠바재무국장이었던 시절 쿠바의 경제는 나락으로만 떨어졌고 게릴라전을 펼쳤을 때도 그의 작전능력과 정보수집능력은 매우 형편없었습니다. 볼리비아에서는 그의 오판으로 인해 부하들 뿐만아니라 그자신도 총살되었습니다.  또한 체는 매우 잔인했는데요. 혁명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회의적인 생각을 가진 부하들은 자신이 직접 그자리에서 총으로 쏴죽이기도 하고 쿠바혁명에 반대하던 시민들은 처형시켜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체가 확실히 뜨거운 피를 가진 세기의 풍운아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겠죠. 쿠바 장관이었던 시절에는 몸소 농민들과 함께 농사일을 하고 무거운 짐을 나르는 등 단 한시도 나태해지지 않고 노동을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또한 안주하지 않고 전세계를 누비며 대업을 이루기위해 발로 뛰어다닌 그 정열은 체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에는 불가능한 이상을 품자"

체의 이 명언에 그에게 배울 모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나이에 의사로서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지만 그것을 스스로 마다하고 혁명의 길에 뛰어들어 39세에 요절할 때까지 자신의 신념을 위해 삶을 살아온, 불꽃같이 타오르는 혁명가.  자신이 한번 품은 이상과 대의에 목숨까지 내걸고 직접 뛰어들 수 있었던 그 패기와 정열. 자신의 게릴라동지들과 함께 정글이나 오지를 전전하며 동고동락했던 그 우애.

보통의 사람들은 부귀공명을 좇고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바리죠. 보통의 사람들은 젊었을 적 자신이 품었던 이상과 정열을 잃은 채 숨막히는 사회에 동화되어 무미건조하게 살아가죠. 보통의 사람들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거나 무모한 것에는 현실적인 판단이 앞서 그것을 마다하려고 하죠.

체의 불꽃과도 같은 인생은 세상에 파묻혀사는 우리가 무엇을 잊고 있었는지를 다시끔 되돌아보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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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피델 카스트로 역시 이전 독재자 바티스타에 비하면 나은 편이고 교육과 의료에 힘써 쿠바 출신 석사, 박사학위자가 부쩍 늘어났고 전체 시민의 평균수명은 78.2세까지 올라갔지만 어쨌든 독재자라는 비난은 면하기 어렵습니다. 현재 전세계의 사회당, 공산당이 정치적 자유주의, 경제적 사회주의 내지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반면에 쿠바는 아직 정치적 자유가 별로 확보되지 못했지요. 쿠바의 인권실태는 1970~80년대의 한국과 비슷한 정도라고 합니다(엠네스티, 휴먼라이츠워치).

그런 반면에 체 게바라는 카스트로처럼 오명을 남기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마침 체 게바라가 살해된 직후인 1968년 전유럽과 미국에서 반전평화운동, 신문화운동 등등 학생과 지식인층, 젊은 직장인층까지 참여한 거대한 규모의 시위가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 그들 시위대의 우상으로 방금 죽은 체 게바라가 등장합니다. 이때부터 위로 눈 치켜뜨는 체 게바라 초상화가 전세계인들에게 알려졌지요.

또한 1980~1990년대 남미의 정치적 민주화 과정에서 극우 독재자들이 저지른 만행들이 널리 알려졌는데(이게 작은 규모의 만행이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니카라과의 소모사만 30만명, 과테말라 우익군사정권은 20만여명을 살해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남미인들에게 또한번 체 게바라가 부각되었지요.

2. 체 게바라가 유난히 존경을 받는 이유는 이런 것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1) 공산주의자 치고는 인명을 존중하는 편이었다.

체 게바라는 군율에 대단히 엄격해 주민 물건 빼앗아온 소년병을 총살해버린 사례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으로 바티스타군 포로들에게 인간적으로 대우해 주었지요. 본인이 의사라서 치료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게릴라로 영입하기도 했습니다. 한 예로, 훗날 체의 최측근이 되어 볼리비아행에도 동참한  다리엘 알라르콘 라미네스는 바티스타군에 정보를 제공하던 사람이었죠. 대숙청, 문화대혁명, 킬링필드나 봐오던 사람들에게 체 게바라는 호치민과 더불어 신선한 충격이었을 겁니다.

2)소련으로부터의 자주성을 주장했다.

대체로 미국이든 소련이든 강대국에 사대하는 위성국의 지도자들이 더욱 폭력적이고 잔인해지기 쉽습니다. 그래야 자신의 약한 지지기반을 보충할 수 있으니까요. 스탈린이 내세운 대위 출신 김일성은 자신보다 좌파활동경력에 있어 훨씬 공이 많은 남로당파, 국내파, 연안파, 소련파 공산주의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이런 이치를 간파한 모양인듯, 체 게바라는 쿠바 공산당원들에게 항상 소련으로부터의 자주성을 강조했습니다. 민중의 지지와 지식층(여론형성층)의 호의적인 평가를 얻기 위해서는 자주적이어야 한다고.. 지금 북한이 주체사상 주체사상 하지만 그것은 과거 소련의 간섭 하에서 정착된 숙청체제의 연장에 다름아니지요.

3)서구인을 건드리지 않았다

체 게바라가 서구인들로부터 호감을 산 이유에는 그가 외국인은 건드리지 않았다는 점도 주효하게 작용합니다. 오사마 빈 라덴,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가 어떤 저항세력보다도 동정을 살수 없는 것은 그가 서구 민간인을 죽였기 때문이지요. 체 게바라는 위해를 가하기는 커녕 미국의 언론인들의 취재요청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그를 서구인, 서구사회에 개방적인 인물로 보이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첨언하면 공산주의라고 하여 다 나쁘다고만 볼수는 없습니다. 서유럽과 일본공산당은 이미 냉전종식 수십년전에 의회민주주의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좌파정책을 추구하기로 방침을 정했지요. 무엇이 어찌되었든 중요한 것은 정치적, 시민적 자유의 인정 여부입니다.

쿠바와 베트남의 공산주의는 비록 이러한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으니 전망이 밝을수는 없었지만 외세 간섭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다는 것, 그리고 이전의 체제보다 낫다는 신념을 시민들에게 제공한 것은 사실이죠.

3. 체 게바라의 죽음은 볼리비아 정부보다 미국 정부가 더욱 강력하게 재촉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볼리비아의 대통령이던 바리엔토스는 체 게바라를 죽이면 남미인들이 들끓고 일어날까봐 처형에는 반대했지만, 미국에서는 합참의장 렘니처 장군이 체 게바라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분위기가 그쪽으로 흘러 바리엔토스에게 체 게바라 처형압력을 가하게 됩니다.

출처 : 장 코르미에 저, <체 게바라 평전>, 실천문학사, 2006